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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2020-05-19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시인의 마을
'옥천 정지용'

    정지용의 시를 읽는 옥천의 아침은 싱그러웠다. 관성회관 주변에 있는 시비들을 찾아보며 아침을 보냈다. 옥천 구읍 죽향초등학교와 정지용 생가, 정지용 문학관을 돌아보는 사이 정오가 지났다. 지용문학공원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읽으며 낮은 언덕을 오르내렸다. 교동저수지 둘레를 걸어서 다시 문학공원 언덕에 섰을 때는 오후의 한가운데였다. 눈동자에 정지용이 태어나고 자란 옛 마을이 맺혔다.
 

정지용 생가 앞, <향수>가 새겨진 시비
 
옥천읍내에 있는 정지용 시비들
    금강 물줄기가 옥천을 휘돌아 나간다. 그 풍경은 언제 봐도 평온하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옛 사람이 있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시인으로 죽은 정지용이 바로 그다.
    1988년 월북 및 납북 문인 해금 조치에 따라 정지용 시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지용회가 만들어지고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뜻에서 시비를 세우게 된다. 관성회관 옆 작은 동산에 지용시비와 그의 상이 있다. 시비는 1989년 지용의 87회 생일에 맞춰 건립됐다. 시비는 턱 낮은 기단 2개 위에 자연석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시비 제막식이 있던 날 아침 옥천에는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단비가 내렸다.
    시비에는 정지용 시인이 스물두 살 때 쓴 시 <향수>가 새겨졌다. 열두 살에 결혼한 지용은 열네 살부터 서울에 있는 처가의 친척 집에서 살았다. 어린 나이에 느꼈던 향수의 깊이는 얼마나 깊었을까? 시비에 새겨진 시 <향수>를 천천히 읽었다. 정지용은 <향수>를 쓴 그해 5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서울보다 더 먼 타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관성회관 앞에는 또 하나의 정지용 시비가 있다. 정지용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2년에 옥천문화원에서 세운 시비다. 옥천군 군서면 금천리에 사는 여옥구, 박분순 씨가 시비로 쓰일 돌을 기증했다. 시비에는 그의 시 <유리창>이 새겨졌다. 
    관성회관에서 내려오는 길, 도로 오른쪽 인도 벽에 시를 새긴 돌들이 줄지어 박혀 있다. 벽에 붙은 정지용의 시를 하나하나 읽는 옥천의 아침이 싱그러웠다.
    정지용의 흔적을 찾는 발걸음은 옥천 구읍으로 향했다. 옥천읍 문정리 죽향초등학교 교정 한쪽에 정지용 시비가 있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다녔다. 동시 <해바라기씨>가 새겨진 시비를 보고 학교를 나선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어린 정지용의 발걸음을 상상하며 그가 걸었던 길을 걷는다.
 
정지용 문학관과 생가
 
실개천 앞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정지용이 살던 집 앞에 실개천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초가로 들어가는 사립문이 코앞이다. 지용의 아버지는 약재상을 했었다. 원래는 현재 생가에서 좀 떨어진 수북리(동네 사람들은 ‘꾀꼬리’라고 부른다.)에 살았었는데, 당시 옥천에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지금 생가 자리로(옥천읍 하계리) 집을 옮겼다. 당시 집은 두 간 짜리 본채에 사랑채가 따로 있었다. 우물도 당시부터 있었다.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었다. 정지용의 가족과 이웃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1996년에 옛 모습과 흡사하게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 앞에는 그의 시 <향수>를 새긴 시비가 있다.
    정지용 생가 뒤에 정지용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전시실 초입 양쪽 벽에 걸려있는 그의 시 <호수>와 <향수>가 사람들을 마중한다. 정지용 시인이 살아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손님을 맞이할 것 같았다.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 연대별로 정리한 전시 글을 읽으며 그의 일생을 한눈에 넣는다. 1902년에 실개천이 흐르는 옥천에서 태어났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학업과 시 창작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일본 유학 생활을 거치며 1926년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1929년 귀국 후 시문학과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게 됐고 1939년 <문장>지 창간과 함께 시 부문 심사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 기라성 같은 문인을 등단시켰다는 기록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7월 말 경에 조선문학동맹 회원으로 같이 활동한 4~5명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함께 나간 게 마지막이었다는 기록과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소문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정지용 생가
 
지용문학공원 언덕에 올라 시인의 마을을 보다
    정지용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와 그 해설을 볼 수 있는 장치 앞에 섰다. 화면에 시가 올라가고 해당 시어 위에 물방울 모양이 얹혀졌다. 그 물방울 모양을 누르면 화면 한쪽에 시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시어를 손으로 받아 볼 수 있는 장치도 있다. 해당 장치 앞에 서서 공중에 비치는 빛에 손바닥을 모으면 글자가 손바닥에 모여 아롱거리다 흘러 사라진다. 정지용 시인의 시어들을 두 손 모아 받아두는 시간은 짧았지만 시어를 고르고 다듬기 위해 인고했던 시인의 시간이 느껴졌다.
    언젠가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을 만나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말 중 일부를 옮겨 본다. “정지용 시인은 항상 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를 구상하고 시를 썼습니다. 종이와 펜이 없으면 머리 속으로 시를 썼습니다. 시인이 쓴 시 모두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시인의 시도 외우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시가 곧 삶이었고, 시에 대한 열정과 정열로 가득했던 분이었지요.”
    전시실에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든 <향수>가 계속 흘러나온다. 시낭송을 할 수 있는 방 옆에서 정지용 시인의 마지막 시 <나비>를 보았다. [내가 인제/나븨 같이/죽겠기로/나븨 같이/날라 왔다/검정 비단/네 옷 가에/앉았다가/窓(창) 훤 하니/날라 간다]
    시 아래 한국전쟁 직전에 발표한 정지용의 마지막 작품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자신의 앞날을 예감하고 있는 듯한 내용이라는 글이 붙었다. 
    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를 읽고 문학관을 나선다.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맑았다. 실개천을 거슬러 올라 도착한 곳은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 것’ 같은 낮은 언덕이었다. 
    지천으로 피어난 조팝나무 꽃이 사람들을 반기는 그곳은 지용문학공원이었다. 공원 곳곳에 여러 시인의 시비가 있다. 시를 읽으며 언덕을 오르내린다. 정지용 시인의 시 <춘설>, <고향> 등의 시를 새긴 시비도 보인다. 문학공원 옆 교동저수지 둘레길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문학공원 언덕에 올랐다. 그곳에서 정지용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옛 마을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