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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생명과 부활에 대한 염원

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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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생명과 부활에 대한 염원
'신라 금관의 미학'

    순도 90%에 육박하는 찬란한 황금빛, 세련되고 독특한 조형미…. 1500여 년 전 경주의 대형 무덤에서 나온 화려한 신라 금관.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가 그렇듯, 신라 금관은 보는 이를 신비로움과 무한 상상으로 이끈다. 저 금관은 누구의 것이고 저 특이한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인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지. 
 

(左) 국보 제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의 수식(ⓒ문화재청)        (右) 국보 제188호 천마총 금관(ⓒ문화재청)
 
발견, 그 자체로 놀라웠던 금관
    현재 우리에게 전해오는 순금제 금관은 모두 8점. 그 가운데 6점이 5~6세기 신라 것이고 나머지 2점은 가야의 금관이다. 신라 금관은 교동 고분 출토 금관(5세기),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5세기, 국보 제191호), 금관총 출토 금관(5세기, 국보 제87호), 서봉총 출토 금관(5~6세기, 보물 제 339호), 금령총 출토 금관(6세기, 보물 제338호), 천마총 출토 금관(6세기, 국보 제188호)이다. 그중 교동 금관을 제외하면 그 형태가 모두 비슷하다. 나뭇가지 모양[出字形] 장식과 사슴뿔 모양 장식을 관테에 덧대어 금못으로 고정하고, 곡옥(曲玉)과 달개 등으로 장식한 모습이다.
    신라 금관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21년 9월 23일 경주시 노서동의 한 집터 공사현장에서였다. 당시 인부들의 신고를 받은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봉분이 훼손된 고분이었지만 금관을 비롯해 새 날개 모양의 관모 장식, 금제 허리띠와 장식, 금제 목걸이와 귀걸이, 금동신발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바로 금관총 발굴이었다.
    금관의 출현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조선총독부는 그 중요성을 감안해 출토 유물을 서울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소식을 전해들은 경주 시민들은 금관의 서울행을 막고 나섰다. 경주 시민들의 저항이 조직적으로 지속되자 조선총독부는 끝내 계획을 철회했고 1923년 10월 경주에 경주유물진열관을 지어 금관 등 출토유물을 상시 공개했다. 이는 신라 문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이 진열관을 금관고(金冠庫)라고 불렀다. 금관고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이 되었다. 

 
(左) 보물 제338호 금령총 금관(ⓒ문화재청)        (右) 경주 대릉원(ⓒ이미지투데이)
 
무덤에서 나온 성스러운 대상
    경주 사람들은 금관총 금관을 왜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것일까. 경주는 고분의 도시다. 도심 곳곳에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이 즐비하다. 경주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덤과 함께 살아간다. 늘 죽음 옆에서 삶을 살아간다. 놀라운 일이다. 그런 경주 사람들에게 신라 고분에서 나온 금관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 금관은 무덤에서 나왔고 그 모습이 매우 특이하다. 그래서일까. 금관에 대한 궁금증도 참 많다. 우선, 금관의 실용품 여부. 역사 드라마를 보면 신라왕들은 종종 금관을 쓰고 나온다. ‘금관이니까 모자처럼 머리에 썼겠지’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금관의 용도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마땅한 증거물을 찾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금관이 실용품인지 아닌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여기서 실용품이 아니라는 견해의 근거를 먼저 살펴보는 게 흥미로울 것 같다. 첫째, 금관은 너무 약한데다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실제로 착용하기가 어렵다는 점. 둘째, 마감이 깔끔하지 않다는 점. 왕이 실제 사용하는 것이었다면 신라의 빼어난 장인들이 마감을 그렇게 엉성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다. 셋째, 금관의 실제 출토 상황. 신라 금관은 죽은 사람(무덤의 주인공)의 이마 위에 씌워져 있는 게 아니라 얼굴을 모두 감싼 모습으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신라 금관이 실용품이 아니라 장송의례품이었다는 견해로 요약된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는 신라왕이 특정 의식 때 금관을 착용했을 것이란 견해다. 금관이 구조적으로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이나 가죽 등의 모(帽)에 부착된 형태로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왕관은 원래 의식용이었기 때문에 실제 착용의 편리함과 거리가 멀다. 신성성(神聖性)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실용적으로 제작할 필요가 없다” 고 보는 이도 있다. 양측의 견해가 모두 흥미진진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단정 짓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주인과 기원에 대한 의견 아직도 분분
    그렇다면 금관의 주인은 누구일까. 우리는 흔히 신라왕이 금관의 주인공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여러 정황으로 보면 금관의 주인공은 왕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그렇다면 금관이 출토된 고분은 왕의 무덤이어야 한다. 그러나 왕의 무덤으로 밝혀진 경우가 아직 없다. 황남대총의 경우, 여성의 무덤인 북분에서 금관이 나왔고 남성의 무덤인 남분(南墳)에서는 그보다 급이 낮은 금동관(金銅冠)과 은관(銀冠)이 나왔다.
    이 무덤이 축조된 5세기 전후 신라엔 여왕이 없었으니 황남대총은 여왕의 무덤일 수 없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금관의 주인공이 왕비일 수는 있어도 왕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금령총에서 나온 금관은 크기가 작아 아이의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왕의 것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금관은 아직 없는 셈이다. 최근엔 신라 금관의 주인을 무당이나 제사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 금관의 기원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스키타이 기마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 시베리아 샤먼의 풍속에서 왔다는 주장, 고조선 초기부터 이어온 한민족 고유의 양식이라는 주장 등등. 나뭇가지 장식을 두고도 생명수(生命樹)라는 견해와 김알지 탄생 설화가 서려 있는 경주 계림(鷄林)의 숲을 형상화했다는 견해가 엇갈린다. 다양한 견해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금관의 역설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죽은 자의 무덤에서 나온, 독특하고 세련된 모습의 신라 금관. 우리 고대사에서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런 금관은 없다. 신라 금관은 아직도 자신의 실체를 온전하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금관을 탐험하고 상상력을 발휘한다. 무덤 옆에서 일상을 꾸려온 경주 사람들이 금관총 금관을 꼭 붙잡았던 것도, 어떤 근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금관의 순도를 조사한 바 있다. 교동 금관 88.8%, 황남대총 금관 86.2%, 금관총 금관 85.4%, 천마총 금관 83.5%, 금령총 금관 82.2%, 서봉총 금관 80%로 순도가 확인되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정말로 순금이었구나!” 금관은 이렇게 우리를 늘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