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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년의 역사와 혼을 담은 북소리, 마음을 울리다

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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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년의 역사와 혼을 담은 북소리, 마음을 울리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 이정기'

    심장 소리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북소리는 때로는 장중하게 멀리 퍼져 나가고 때론 신명난 장단이 되어 흥을 돋운다. 우리나라에서 북은 궁중 행사 등 격식을 갖춘 자리는 물론이고 전쟁터와 사찰, 마을 어귀나 장터에서도 사용되었다. 다른 악기와 달리 북은 제의나 굿판에서도 쓰이며 신물(神物)로 여겨졌기에 북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 이정기 선생은 정성과 혼이 담긴 소리를 만들기 위해 매일 수백 번의 대패질과 무두질을 하며 우리나라 전통 북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악기장(樂器匠)이란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 또는 그러한 기능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고구려의 벽화 등을 통해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해 사용하였다. 1995년 3월 16일 북 만드는 공예기술인북 메우기 종목이 악기장에 통합됐다.


전통 북에 숨결을 불어넣은 장인
    고구려시대 고분인 안악 3호분 벽화의 <행렬도(行列圖)>를 보면 맨 앞에 북을 치는 사람이 있고 그 뒤를 이어 기병과 보병, 군악대 등 250여 명이 줄줄이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마을 풍물굿과 판소리 등 다양한 전통음악에서 중심을 잡는 악기는 바로 북이다.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조선시대 <무악도(舞樂圖)>에는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이 장고, 대금, 해금을 연주하고 한 명의 젊은이가 춤을 추고 있다. 시선의 중심에는 갓을 쓴 이가 북채를 손에 쥐고 나무로 된 틀에 매달린 좌고(座鼓)를 힘차게 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해 편찬한 『악학궤범』에도 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에 쓰인 진고(晉鼓)와 당악기로 궁중정재 때 사용된 무고(舞鼓)가 대표적이죠. 기록은 충분하지 않지만 『악학궤범』에 소개된 타악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우리나라 전통 북을 계승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우리나라 역사와 혼이 고스란히 담긴 전통 북을 지금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정기 선생이 46년 동안 우직하게 한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左) 북을 만드는 일은 장인 한 사람이 단청까지 모두 수행하는 고된 작업이다.         (右) 정확한 각도로 나무를 깎고 빈틈없이 이어 붙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악기장(樂器匠)’은 우리나라 전통악기를 만드는 기능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고구려의 벽화에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가 모두 등장해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설치해 국가에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해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문화재 보전 차원에서 악기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북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북 메우기’ 종목은 1995년 3월 악기장으로 통합되었다.
    “북 메우기는 동그란 나무통에 가죽을 씌워 북을 만드는 기술을 말하는데 그 기술자를 옛날에는 고장(鼓匠)이라고 불렀어요. 처음 북 만들기를 배울 때까지만 해도 잘 다듬어진 나무 조각을 이어붙여 공명통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과 북 메우기 장인이 따로 있었지만 전수자가 부족한 현재는 분업을 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북 만드는 장인 한 사람이 나무와 가죽, 단청 작업을 모두 해야 하기 때문에 더 고된 작업이 되었지요.”

무두질 같은 시련에도 꿋꿋하게 뿌리내린 열정
    이정기 선생은 17세부터 생계를 위해 북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충남 공주에서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상경 후 부친 대신 가장 역할을 하며 돈벌이에 나섰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한 시계 수리점에서 故 박균석 선생의 조카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북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서대문구 무악동으로 스승을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드럼 같은 서양악기를 만드는 일인 줄 알았다. 북에 대한 지식도 손재주도 부족했지만 곧 재미를 붙여 스승의 작업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다.
    흔들림 없이 기술을 익힌 끝에 그는 1980년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스승인 故 박균석 선생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된 해에 전수장학생이 되어 더욱 뜻깊게 느껴졌다.
    전승공예전에서 수차례 수상하면서 스승과 함께 국립국악원 ‘우리 전통악기 원형 복원’ 사업도 진행했다. 지난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된 이후에도 그는 매년 악기장 연합 공개행사에 참여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처음 3년 동안은 재미있었고, 5년 차가 되니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10년이 지나니 겸허함이 생겼습니다. 29세 때 대패질을 하다가 손을 크게 다쳐 반 년 동안 일을 하지 못했던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죠. 스승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일도 많이 줄어들고 세월이 흐를수록 재료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어요. 55세 되던 해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을 때 그동안의 시련과 즐거웠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여전히 북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그 시절의 보람과 열정을 묵직한 북소리에 담아내고 싶어요.” 

 
이정기 악기장이 제작한 북 작품들 
 
우리 고유의 북소리를 계승하기 위한 염원
    북의 종류에 따라 나무와 가죽을 다루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기본적인 설계도는 물론 북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공식이나 이론도 따로 없어 오직 장인의 손과 귀에 의지해 북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주재료인 나무를 정확한 각도로 깎고 빈틈없이 이어 붙여 둥근 통을 만든다. 다음은 가죽 작업을 할 차례. 일하는 소가 별로 없는 지금은 질긴 소가죽을 얻기 위해 여러 지역의 도축장을 돌며 발품을 팔아야 한다.
    부위마다 두께나 질감이 달라 선별작업도 꼼꼼하게 하는 것은 필수. 재료를 구한 후에는 가죽에 붙어 있는 살덩이와 기름, 털을 제거하고 고르게 한 후 무두질을 한 다음 쟁을 쳐서 2~3일 건조시킨다. 건조된 가죽은 물에 2~3일 담구어 불린 후 메우고자 하는 북통에 알맞게 자른다. 그후 북통에 씌워 맨발로 밟아 부드럽게 늘리는 과정을 3~4번 반복하고 북통에 고정하여 4~5일 건조시킨다. 북통 겉면에 안료로 용, 봉황, 꽃 문양 등을 그리는 단청 작업을 한다.
    “200여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하나의 북이 완성되기에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어요. 북이 완성되는 순간은 제대로 된 북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입니다. 정성과 혼이 담겨야 주변의 산야와 마음까지 울리는 소리를 만들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소리인데 아직 맘에 차는 북을 만들지 못했어요.”
    『악학궤범』에 소개된 타악기를 복원하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국립국악원 궁중음악 연주에 그의 북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불국사와 구인사 등 사찰의 법고를 제작, 수리하는 일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북을 전승하기 위해 1998년에는 진정국악기연구원을 설립했다. 8년 전에는 ‘이정기국악기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전수를 본격화했다. 지금은 아들 이선용 씨와 김순옥 씨가 전수생이 되어 작업을 함께 하고 있다.
    “두 명의 전수생에게 북 만들기 기술을 전하게 되어 다행이지만, 북의 재료인 질 좋은 소나무나 황소 가죽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에요. 나무도 수입해서 써야 하고 가죽은 육우로 대체된 지 오래라 예전보다 시간과 공력이 더 많이 들어가요. 합성 소재와 대량생산 기술을 통해 제작된 북이 전통 북을 밀어내는 현실도 안타까워요.”
    대량생산된 악기는 장인의 기술로 만들어진 북의 소리와 내구성을 절대 갖지 못한다. 우리나라 전통 북은 재료와 기술에 대한 이해와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장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북 만들기가 세대를 거쳐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의 관심과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었으면 한다는 이정기 선생의 소망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