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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과 운치를 아는 당신을 위한 길, ‘관동 풍류의 길’

2021-07-21

문화 문화놀이터


타박타박 걷는 문화유산 오솔길
멋과 운치를 아는 당신을 위한 길, ‘관동 풍류의 길’
'고고한 역사를 품은 양양과 속초'

    조선시대 시인 묵객은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바로 강원도의 아름다운 명승지, 관동팔경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요즘도 다르지 않다. 다만 옛 선인들은 그것을 관동팔경이라 했고, 우리는 풍류의 길이라 한다. 멋과 운치가 묻어나는 강원도의 빼어난 자연유산과 관동팔경이 있는 '관동 풍류의 길'을 다녀왔다. 


고택에서 느끼는 특별한 멋과 운치
    맑은 하늘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다. 빗줄기는 투명한 물이 아니다. 일정한 굵기의 패턴을 지닌 먹색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굵은 먹색 물줄기. 다름 아닌 120여 칸의 화려한 저택을 뒤덮고 있는 기와의 물결이다. 기와는 하늘에서 비질하듯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몇 걸음을 옮겨 다시 유심히 살핀다. 기왓장이 흑진주처럼 반짝인다. 햇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측면을 비춘 까닭이다. 한옥 주변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소나무가 무성해 바람을 쉬이 막아준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고고한 운치에 눈과 몸이 편안하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곳은 국가민속문화재 강릉 선교장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 처음 지은 것으로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증축과 보수를 해온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햇수로 따지만 300여 년의 세월이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이 가옥이 위치한 곳이 배다리마을(선교리)이어서다. 그 당시 선교장에서 배를 타고 경포호까지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경포호가 넓었던 것이다.
 
우뚝 선 낙산사의 해수관음상

    선교장에서는 오감이 모두 즐겁다. 은은한 가야금 소리, 눈이 편안한 신록과 그윽한 솔향, 손때 묻은 오래된 나무에서 느껴지는 반질반질한 질감,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있어서이다. 그 옛날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이 선교장을 방문하는 게 그들만의 버킷리스트였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하겠다. 선교장은 족제비를 쫓다가 발견한 터에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뜻인데,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활래정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이만 한 명당은 보지 못했다며 무릎을 ‘탁’ 치게 된다. 활래정은 선교장 초입에 있는 인공 연못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정자이다. 여름에는 연못에 연꽃이 만개해 활래정에서 보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길게 줄을 이은 듯한 줄행랑과 사랑채 ‘열화당’도 선교장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특히 열화당의 차양은 선교장에 초대되었던 러시아 공사가 선물한 것으로 값비싼 구리를 소재로 만들어 눈길을 끈다. 안채와 연결된 문의 아래쪽이 특이하다. 문지방으로 막지 않고 트여 있다. 이 집터를 안내해 준 족제비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채에서 집 뒤쪽으로 가면 초가로 지은 초정이 있다. 선교장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이곳에서 보는 풍광이 일색이다. 내친 김에 발걸음을 숲길로 향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길을 따라 이어져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교장 박물관에는 광해군 하사품 말안장, 추사 김정희의 현판(홍엽산거)을 비롯해 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 중이다. 
 
선교장 중행랑에서 바라본 안채
 
바람과 물이 흐르듯 쉼이 흐르는 곳
    관동 풍류의 길 다음 장소는 검은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뜻의 보물 오죽헌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 별당 건물이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 비교적 오래된 건물로 손꼽힌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이곳에서 낳을 때 꿈에 용이 나타나서 방 이름을 몽룡실이라 지었다. 신사임당은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고, 아들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한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오죽헌에 들면 정면에 이이에게 제향하는 문성사가 있고 몽룡실은 왼편에 있다. 몽룡실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수령 6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목이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일명 ‘율곡매’로 불리는 나무인데 사임당의 매화 그림과 율곡이 쓰던 벼루 장식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오죽헌에는 600년 된 배롱나무와 300년 넘는 소나무 ‘율곡송’ 등이 있어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별당 옆에는 단아한 모습의 안채가, 그 앞에는 사랑채가 자리를 지킨다. 툇마루 기둥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쓰인 주련이 걸려 있어 가문의 기품을 소리 없이 대변한다. 안채를 지나 협문을 통과하면 정조대왕이 이이를 칭송하여 세운 어제각이 있다. 원래는 문성사 자리에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와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과 이이의 삶의 편린이 흩어져 있다. 그 조각을 맞추듯 일상보다 느린 걸음으로 오죽헌을 산책한다. 그들이 누렸던 풍류 속으로 성큼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간 것 같다. 강릉 풍류의 길 마지막에는 경포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보물 경포대를 만날 수 있다. 경포대는 고려 말 안축의 「관동별곡」을 시작으로 조선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등장한, 요즘시대의 ‘핫플’ 같은 곳이다. 
    그런 만큼 경포대 누각 안에는 수많은 편액이 걸려 있어 마치 조선시대 갤러리에 온 듯하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규모가 큰 누정이다. 특이한 것은 일반 누정과 달리 내부에 누마루를 2단으로 설치해 공간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누마루에 오르면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와 가슴 깊은 곳까지 탁 트인다. 경포호 수면을 휘감아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잊을 만큼 시원하다. 
 
左) 오죽헌의 사랑채   右)월정사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
 
고고한 역사를 품은 양양과 속초
    관동 풍류의 길은 동해안을 따라 보물 양양 낙산사로 이어진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1년(671)에 창건했다. 낙산이란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산을 가리키는데 산스크리트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바다 근처 험난한 바위가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곳에 머문 까닭에 낙산사 역시 동해를 마주한 언덕에 터를 잡았다. 낙산사는 2005년 화재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때 화마가 삼킨 것 중에는 낙산사동종이 있다. 잔해는 낙산사 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 외 보물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보물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등이 있다.
    풍류길 가운데 속초 신흥사는 국립공원 설악산 초입에 있어 등산을 겸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으로 보물 속초 신흥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보물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 보물 속초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등이 장구한 세월을 일깨운다. 평창의 월정사는 관동 풍류의 길 마지막 장소이다. 이곳 역시 보물상자를 품고 있는 듯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탐방객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국보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외에도 문화재 60여점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찬란한 문화재 못지않은 명품 숲길이 있어 휴식을 원하는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1km 남짓한 전나무 숲길은 마치 터널을 지나는 듯 아늑하고 깊다.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있어 풍류길의 매력이 더 깊고 넓다.